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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13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4)-국가위기를 두 어깨에 진 천총 양헌수 조선은 1866년 천주교 신자 8천 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인해 프랑스 함대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한강 하구의 염창항(鹽倉項,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치된 차단선을 뚫고 서강 입구까지 들어왔다가 10월 3일 산둥반도의 지부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 1천 여 명을 군함 7척에 싣고 10월 11일 로즈(Rose) 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부항을 떠났다.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인근에 정박했다. 14일에는 강화해협을 30㎞나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동북단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강화 수로 양안에 있는 돈대 및 포대를 병인양.. 2020. 3. 27.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3)-진정한 목민관, 제주 목사겸방어사 양헌수 양헌수는 무과에 급제한 이듬해인 1849년 선전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54년(철종5)에는 평안도 동부의 희천(熙川) 군수가 되어 처음 외직으로 나갔다. 당시 희천에는 가혹한 요역 때문에 백성들이 도망친 빈집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이 같은 실태를 파악한 그는 먼저 민심을 안정시켜 백성들의 이탈을 예방하고, 이미 도망간 백성들도 돌아오게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20여 가지 민생안정 대책을 강구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1858년(철종9)에 어영청 초관을 거쳐 당상관(3품)으로 승진했다. 이듬해(1859) 겨울에 함경도의 오지인 갑산(甲山) 부사로 나갔다. 양헌수는 희천 군수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수많은 폐단을 제거하고 변방의 경비를 강화하는데 노력을 기.. 2020. 3. 24.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2)-인생의 진로를 무인의 길로 바꾼 양헌수 문무겸전한 선대 가계의 전통을 계승할 양헌수는 순조 16년(1816) 12월 18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 광탄리(양평군 용문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유학에 입문하여 기초를 다졌다. 13세 때인 1828년 학문 세계를 더 한층 넓히기 위해 새로운 스승을 찾아갔다. 이때부터 양헌수는 당대의 거유로 명망이 높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하에서 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동문수학한 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 등은 모두 문인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이들은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창한 공통점이 있다. 양헌수는 15세 때인 1830년(순조30) 군수 이행검(李行儉)의 딸인 고성 이씨와 .. 2020. 3. 20.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1)-문무겸전한 양헌수 선대 혈통 양헌수(梁憲洙:1816~1888)는 19세기 중반을 전후해서 활약한 조선 말기의 대표적 무인이다. 그의 선대 양우량(梁友諒)이 신라로부터 남원부백(南原府伯)의 작위를 받은 것을 계기로 하여 남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에는 梁씨를 비롯해 고(高)씨와 부(夫)씨가 있어서 제주 양씨로도 불린다. 조선조에 명성을 날린 인물로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가 대표적이다.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6조에 걸쳐 이조판서․사헌부 대사헌․홍문관 대제학 등과 같은 요직을 두루 거친 명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성지의 저작인 『눌재집』은 보통 문신들의 문집과는 달리 국방과 관련된 주장을 많이 담고 있다. 문묘(文廟)에 상응하는 무묘(武廟)를 세우고 무풍(武風)을 .. 2020.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