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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13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8)-임오군란도 비켜간 청백리 ‘양대장’ 집 정족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는 한성부 우윤(정3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서구 열강의 재침이 두려워 관직을 내놓고 낙향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양헌수는 “우리 집안은 국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유사시에는 나라에 몸을 바쳐야 하는데 어찌 한 발자국인들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양헌수는 용양위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진무영 중군, 어영청 중군, 금위영 중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사옹원제조 등 요직을 거쳤다. 1869년 12월에는 황해도 육군의 최고사령관인 황해병사(종2품)로 부임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자신의 조부 양완(梁垸)이 경상좌수사를 역임했고, 또 증조부 양세현(梁世絢)이 앞서 황해병사를 역임한 뒤였다. 증조부가.. 2020. 4. 6.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7)-양헌수가 필승하는 ‘지피지기’의 전투 양헌수는 11월 9일 오전 9시경에 이미 척후의 보고를 받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남문과 동문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정족산 어귀에 유인조를 내보냈다. 조선군의 개인화기 사거리가 짧기 때문에 적을 유효사거리 이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전술이다. 유인조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접근해 오자, 시선을 끌어 유인했다. 프랑스군 1개조를 정족산성 동문 쪽으로 유인한 후 주력부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2시경에는 올리비에 대령의 본대가 전방 100 미터 지점에 나타났다. 이때 동문에 배치된 포수 이완보(李完甫)가 프랑스군을 조준사격으로 쓰러뜨렸다. 일제 사격 신호였다. 조선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과 양헌수의 효과적인 작전지휘로 적을 타격했다. 올리비에 대령은 .. 2020. 4. 3.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6)-전술의 기본에 충실한 천총 양헌수 양헌수는 선발대 38명을 직접 이끌고 11월 6일 오후 4시경 덕포 나루에 도착했다. 앞서 숨겨 둔 선박을 끌어내 도하 준비를 갖추고, 이날 저녁에 후속 부대가 도착하자 5척으로 도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이튿날(11.7) 새벽에 중군 이용희로부터 통진부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덕포와 통진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이르자 다시 덕포로 돌아가 계획대로 추진하라는 명령이 다시 전달되었다. 덕포로 돌아온 양헌수는 날이 어두워지자 제1진 170명을 3척에 나누어 도하시켰다. 이때 후방 쪽에서 뱃머리를 돌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양헌수는 짐짓 목청을 높여 ‘소리친 자를 당장 잡아와 목을 쳐라’고 호통을 쳤다. 겁먹은 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임기응변이었다. 제1진이 광.. 2020. 4. 1.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5)-철저한 지형정찰과 양헌수의 전략 판단 순무 천총 양헌수는 10월 16일 자정 무렵 도성을 출발하여 17일 아침 한강 양화진에서 흥선대원군의 격려를 받으며 강화도로 떠났다. 18일 해질 무렵에 통진에 도착하여 임시 둔지를 설치했다. 이어서 중군 이용희의 본대가 도착한 후 출동 준비를 갖추었으나 정작 타고 갈 선박이 없었다. 이때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대표 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직접 작성하여 프랑스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삼정승을 처벌하고 수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천총 양헌수의 판단은 단호했다.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19일 지리에 밝은 인근 주민과 함께 통진 뒷산에 올라가 정찰을 실시했다. 프랑스 함대의 전체적 규모와 군세를 파악한 후 매복조와 정찰조를.. 2020.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