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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순종적 기질 일본 국민은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우리처럼 격렬하게 반대하는 신문기사나 방송뉴스를 접하기 어렵다. 정치에 무관심해서 인가? 언론이 부추기지 않아서 인가? 하여간 격렬한 반대를 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일본 전통시대의 사회상에서 답을 찾아야 할 듯하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정부가 하는 일을 비판하는 세력은 암살자(자객)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죽기 싫으면 입 다물고 죽은 듯이 있는 게 상수가 아닌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습관화되어버린 일본인들은 겉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그렇다고 속으로도 항상 웃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2020. 6. 7.
3.고구려 성곽 공방전의 특징(2) 한편 7세기 초반인 612년(영양왕 23) 수 양제가 지휘하는 1백만 대군의 침입을 받고 요동성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둔 사례도 있다.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작전으로 대항하다가 성곽이 붕괴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투항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시간을 벌며 수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트리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고구려군은 4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 수군의 침공작전을 무력화시켰다. 특히 을지문덕이 살수 전투에서 섬멸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수성전의 전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613년에도 요동성에서 주야로 20여 일 동안 비루·운제·지도·충제 등 각종 공성장비가 투입된 포위 공격을 물리쳤다. 현장에서 특수 제작한 공성장비들을 투입하여 공성전을 재개하던 중에 국내에서 군량 수송 책임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 2020. 6. 5.
3.고구려 성곽 공방전의 특징(1) 삼국 중에서 고구려는 한반도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대륙의 한족은 물론 기병을 주력으로 한 북방민족의 침공을 빈번히 받아 수성전을 전개했다. 선제공격으로 공성전을 전개한 사례가 백제나 신라에 비해 많은 편이다. 고구려가 수성전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는 172년(신대왕 8) 11월 한나라 침공군을 맞이하여 예봉을 피하면서 수도 국내성에서 지구전으로 성공한 경우일 것이다. 장거리를 이동한 한나라 군사의 최대 약점인 보급난과 작전지역의 기온 저하로 인한 일기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동국병감』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는 한군이 1천 리를 기동하여 장거리 보급로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지구전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2020. 6. 2.
중국 대련에서 백두산까지-1 2019년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4박5일 동안 고교 동창 4명이 부부동반으로 페키지 여행을 다녀왔다. 대련 공항에 도착--단동(안동도호부에서 유래한 안동의 지명이 기분 나쁘다고 김일성이 팽덕회(-->모택동)에게 개명을 요청하여 발음이 유사한 단동으로 바꿨다는 설)--통화(2박)--백두산--통화(3박)--집안--단동(1박과 4박)--여순--대련. 단동철교는 6.25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고 일부만 관광할 수 있다. 압록강을 거슬러 수풍발전소 바로 앞까지 유람선 타고 접근했다. 북한군의 고기잡이 배와 경비 초소들이 가까이 보였다. 2020.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