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중에서 고구려는 한반도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대륙의 한족은 물론 기병을 주력으로 한 북방민족의 침공을 빈번히 받아 수성전을 전개했다. 선제공격으로 공성전을 전개한 사례가 백제나 신라에 비해 많은 편이다.
고구려가 수성전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는 172년(신대왕 8) 11월 한나라 침공군을 맞이하여 예봉을 피하면서 수도 국내성에서 지구전으로 성공한 경우일 것이다. 장거리를 이동한 한나라 군사의 최대 약점인 보급난과 작전지역의 기온 저하로 인한 일기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동국병감』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는 한군이 1천 리를 기동하여 장거리 보급로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지구전을 전개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청야작전으로 보급을 차단하면 1개월 이내에 스스로 퇴각하게 할 수 있으며, 그 후미를 정예군사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둔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고구려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한군은 야전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사기가 저하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정예 기병으로 한군의 후미를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한군의 침공 초기 예봉을 수성전으로 약화시키고 지연전으로 보급상황을 악화시켜 기아와 추위에 사기가 떨어져 스스로 퇴각하는 침공군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입힌 수성전의 성공적 사례다.
이 같은 성공 사례와는 반대로 수성전에 실패하여 국가적 위기를 맞이한 경우도 있다. 고구려는 246년(동천왕 20)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임시 수도인 환도성을 빼앗겼다. 관구검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동천왕이 기병 2만 명으로 초전에 승리하여 적군을 얕잡아 본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철기병 5천을 앞세워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관구검에게 역습을 당하여 대패했다. 동천왕은 압록강 쪽으로 탈출한 후 환도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로 1백여 년이 지난 342년(고국원왕 12) 연왕 모용황이 이끄는 5만 5천 명(북로 1만 5천, 남로 4만)의 침공을 받고 북로에 정예병 5만을 배치했으나 남로에 배치한 노약군사들이 붕괴되면서 환도성이 함락된 경우다. 고국원왕이 이끄는 노약한 군사가 남로에서 붕괴되자 국왕과 주력군이 붕괴된 상황에서 수도인 환도성이 쉽사리 함락당한 사례가 있다. 이때 환도성의 성벽은 붕괴되고 내부는 불에 타서 초토화되었다. 이는 환도성에서 공방전을 전개한 경우는 아니지만, 도성의 방호력을 이용하지 않고 정예군을 출성시켜 외곽에서 운용하다가 실패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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