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7세기 초반인 612년(영양왕 23) 수 양제가 지휘하는 1백만 대군의 침입을 받고 요동성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둔 사례도 있다.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작전으로 대항하다가 성곽이 붕괴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투항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시간을 벌며 수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트리는 전략이었다. 그 결과 고구려군은 4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 수군의 침공작전을 무력화시켰다. 특히 을지문덕이 살수 전투에서 섬멸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수성전의 전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613년에도 요동성에서 주야로 20여 일 동안 비루·운제·지도·충제 등 각종 공성장비가 투입된 포위 공격을 물리쳤다. 현장에서 특수 제작한 공성장비들을 투입하여 공성전을 재개하던 중에 국내에서 군량 수송 책임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서둘러 철수했다. 요동성에서 장기간 돈좌되었기 때문에 작전을 포기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수성작전은 주요 거점의 성곽에서 침공군을 고착시킴으로써 공성부대가 불리한 여건에 봉착할 때까지 지연시키는데 주안을 두었다. 이 같은 고구려의 수성전략이 4차에 걸친 수군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수가 멸망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는 당 태종의 친정에도 불구하고 약 2개월이 넘도록 안시성에서 당군과 대치함으로써 스스로 포기하고 기수를 돌리지 않을 수 없도록 수성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한 차례 출성공격에 실패한 후로는 성문을 아예 폐쇄하고 수성전으로 일관하여 성공한 것이다. 결국 요동지역 초겨울 추위가 닥쳐오고, 북방민족이 당의 변방을 침공하는 사태로 인해 고구려에 유리한 상황이 도래했던 것이다(참고문헌: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동국병감』 상권, 1984).
'역사와 이야기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고려의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2) (0) | 2020.06.19 |
---|---|
4.고려의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1) (0) | 2020.06.16 |
3.고구려 성곽 공방전의 특징(1) (0) | 2020.06.02 |
2.우리나라 성곽 종류와 공방전 양상(2) (0) | 2020.05.29 |
2.우리나라 성곽 종류와 공방전 양상(1) (0) | 2020.05.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