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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함대의 침공

by 헬나이트 202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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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신유사옥과 기해사옥 등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성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조선 지배층의 위기의식도 함께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제거하여 국왕의 전제권을 강화시키고, 쇠퇴해가는 유교적 전통 질서를 재건하는데 주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종 즉위 이듬해인 1864년 2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부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등 남진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이 같은 국가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인 선교사를 이용하는 방안이 제기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Berneux) 주교에게 러시아 남진을 저지시키는 데에 협력하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고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협상 과정은 베르뇌 주교가 1864년 8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파격적인 결정으로 천주교계가 고무된 반면 조야 인사들은 더욱 위기의식을 느꼈다.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조대비(익종의 비)와 중신들이 흥선대원군을 비난하면서 천주교 탄압과 쇄국양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조정의 비난 여론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때마침 통상을 요구하던 러시아인들의 움직임도 잠잠 해졌다. 이 무렵 청국에서 천주교가 배척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서도 양이․척사 의식이 한층 고조되었다. 결국 1866년(고종 3) 2월 조선에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졌다. 3월 29일까지 프랑스 신부 9명과 함께 홍봉주․남종삼 등 신자 8천여 명도 처형되었다.

병인박해 기록화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신부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당하고, 페롱과 리델은 충청도 공주 부근의 산중에 은신하고, 깔레 신부는 충청도 진천(鎭川)에 숨었다. 그리고 병인사옥의 전말을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고하기로 함에 따라 리델 신부와 신도 10여 명이 6월 29일 서해안을 출항했다. 7월 7일 산둥반도의 즈푸항(芝罘港)에 도착하여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보고하자 비로소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 박해사건인 병인사옥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병인사옥은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하는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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