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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해주석씨’와 항일 의병장 석상룡(石祥龍)을 아시나요?

by 헬나이트 2021.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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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포상정보’에는 석상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 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산청·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지리산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었다.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항일 의병장 석상룡 전적비(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병장 석상룡 전적비 설명문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을 모아 일제에 항거했던 의병장 석상룡은 황해도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해주 석씨다. 그의 선대도 3백 여 년 전 임진년(1592) 왜란 때문에 명나라에서 불가피하게 조선으로 피신했고, 이제 석상룡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가문은 왜적과의 악연이 깊고도 질기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 초상화

석상룡의 선대는 누구인가? 조선이 임진왜란의 고통을 겪을 때 이웃 명나라 국방부 장관격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이다. 석상룡 의병장은 석성의 장남인 석담(石潭)의 13세손이다. 그러면 석성은 누구인가? 그는 위기에 처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명군을 파병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석성을 시조로 한 석담과 석천의 가계도

조선은 1592년 왜적의 전면 침공을 받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다. 조선의 지원요청을 받은 명은 파병을 망설였다.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여 파병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분이 병부상서 석성이다.

그런데 석성이 명군 파병의 당위성을 주장한 데는 그 부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석성은 앞서 부인으로부터 애절한 과거사를 듣고 이미 한 차례 조선 왕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준 일이 있다.

조선 역관 홍순언 관련 서적

조선 조정은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4명의 왕을 시해했다’는 요지의 잘못된 기록을 명 태조 실록과 대명회전 등에서 발견하고 경악했었다. 고려 우왕 때의 권신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수차례 수정을 요구했으나 명은 무려 2백 년 동안 외면했다. 우리역사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사건으로 불린다. 왕실의 ‘종계’가 잘 못 기록되었으니 수정해 달라는 요구를 외면하며 조선 왕실의 애간장을 태웠다.

잘 못 기록된 조선 왕실 '종계'

이 골치 아픈 사건을 1584년(선조17) 단번에 해결한 이면에 바로 석성의 류씨(柳氏) 부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사신의 통역관인 홍순언(洪純彦)과 류씨 부인의 드라마 같은 인연이 해결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류씨는 일찍 부모님을 잃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연경에서 홍순언의 무조건적인 도움을 받았고, 그 후로 이에 보답할 기회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성과 류씨부인이 홍순언을 맞이한 북경성의 조양문 

당시 예부시랑(혹 예부상서)인 석성은 자신의 소관 사무인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그 후 자리를 옮겨 국방부 장관격인 병부상서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간절한 파병 요청을 수용하는데 앞장서게 된 것이다. 석성은 명군을 파병하여 왜군의 북상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명군은 조선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명은 재정적으로도 엄청난 부담을 안고 휘청거리게 되었다. 모든 화살이 석성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투옥되고 말았다.

명군을 조선에 파병한 신종(13대) 만력제 초상화

차남 석천(石洊)은 아버지 석성의 지시에 따라 조선으로 피신했다. 1597년 요동에서 선박을 이용해 호남을 거쳐 합천의 가야산 남쪽에 정착했다. 조선 조정은 석성의 아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석천이 경상북도 성주 용암면 대명동(大明洞)에 정착해 석성을 시조로 하는 ‘성주석씨’가 된 연유다. 대명동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시문용(施文用)과 서학(徐鶴)이 귀국하지 않고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석천은 서학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니 참 기묘한 인연이다. 그리고 시문용의 부친인 시윤제는 당시 병부시랑(국방 차관격)으로서 병부상서(국방 장관격) 석성과 함께 명군의 조선 파병을 적극 주장한 인연이 있었다. 시문용도 석천과 각별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서학(왼쪽)과 시문용의 유허비, 두 장수를 모신 풍천재(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문명2리 대명마을)

그 후 석성의 장남 석담(石潭)은 석방되자 어머니 류씨와 함께 조선으로 피신해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에 정착했다. 석성은 1599년 9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장남 석담이 조선에 들어와서 수양군(首陽君)에 책봉되고 역시 석성을 시조로 하는 ‘해주석씨’로 정착하여 가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앞서 입국한 동생 석천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여진족의 청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청나라는 석성의 아들을 압송하도록 조선에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석성의 후손들을 해주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으로 빼돌렸다. 이들은 현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당시 산음현 모호리)에 자리 잡았다. 청나라에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둘러댔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생초면 평촌리 추내마을과 '해주석씨 세거유허비'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해주석씨 세거유허비' 전면

석성의 후손들은 다시 지리산 깊은 계곡 함양군 마천면 추성동으로 이주하여 숨어 살았다. 수백 년이 지난 근래에 이르러 석성의 후손들이 만났다. 족보도 같이 통합했다. 가슴 아픈 이산가족의 드라마 한 편이 완성되었다.

석성 직계 후손들의 족보

이 같은 석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물이 항일 의병장 석상룡이다. 그는 조선으로 다시 쳐들어온 일본군을 향해 복수의 총검을 뽑아들었다. 가문의 수 백 년 숙적이 다시 쳐들어왔다. 성삼재전투, 벽소령전투, 쑥밭재전투 등을 치르며 일제에 항거했다. 중과부적으로 체포되어 5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1920년 10월 26일 50세로 순국했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조성된 그의 묘소 앞에는 작은 송덕비가 세워졌다.

의병장 석상룡 묘소와 송덕비(앞면,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동)
'의병장석상룡지송덕비' 옆면
상처가 깊은 석상룡 의병장 송덕비(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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