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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Ⅰ 조경남 『난중잡록』은 어떤 책인가

by 헬나이트 2020.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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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은 조선 중기에 유학을 공부한 조경남(趙慶男:1570~1641)의 저작물이다. 저자 조경남은 태종 대에 우의정을 지낸 한양 조씨 한평부원군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중종 조에 호조판서를 역임한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1570년(선조3) 11월에 남원부 원천(源泉) 내촌리(內村里)에서 사직(司直) 벼슬을 한 아버지 조벽(趙璧)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 남원시 산내면 원천 산촌 생태마을 표지판

조경남의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晝夢堂) 등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산서잡록』·『산서야사』 등이라 하였다. 저자 조경남은 부인 경주 김씨와 혼인하여 세 아들 시영(時嬰)·시형(時亨)·시탁(時鐸)과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정인화(鄭仁和)다.

조경남은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10세부터는 유인옥(柳仁沃)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전력했는데, 일취월장하는 글재주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틈틈이 활과 화살을 만들어 말을 달리며 쏘는 연습을 즐겨했다고 한다. 스스로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성장해갔던 것이다.

영집 궁시박물관의 활 화살만들기 체험프로그램에 소개된 활과 화살

저자 조경남은 1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고, 외조모 허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때인 1582년에 발생한 특이한 기상 이변을 보고 장차 국가에 큰 변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견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그가 기록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은 18세 되던 1587년(선조20)부터 중봉 조헌(趙憲)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에 전렴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23세 청년의 혈기로 고경명 의진에 참여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연로하신 외조모를 모시고 산속으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아가 된 자신을 부모처럼 길러주신 외조모를 두고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경남 의병장의 스승 조헌 의병장 동상(경기도 김포시)

조경남은 1598년 외조모가 별세한 후 전라 병사의 부름을 받고 비로소 참전하였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대에 이르러서는 ‘주몽당’이라는 현판을 달고 학문 정진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624년(인조2) 진사시에 급제했다.

조경남 의병장이 급제한 진사시와 생원시 재현행사가 열리는 성균관 명륜당

55세 조경남 의병장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조선 왕조를 통틀어도 희귀한 사례일 것이다. 그의 남다른 집념과 열정이 가져다 준 결과로 보인다. 이때부터 ‘산서병옹’이라고 자처하면서 방장산(전북 고창군 신림면) 서쪽 용추동 계곡에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조경남 의병장이 피신한 용추동 계곡의 용추폭포(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조경남은 향년 72세를 일기로 1641년(인조19)에 세상을 떠났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선비로 초야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책에는 소년 시절은 물론 장년과 노년을 거치면서 더욱 빛을 발하는 뛰어난 문재(文才)가 저변에 깔려있다고 할 만하다.

조경남 의병장의 묘소(전북 남원시 이백면)

1610년(광해군2)에 4편을 완료하여 『난중잡록』이라 명명했다. 임진·정유 양란의 체험담을 중심 주제로 한 야사집을 편년체로 집필한 것이 『난중잡록』이다. 1618년 스스로 붙인 서(敍)에 “승전의 소식을 들으면 춤을 추면서 그 일을 기록했고, 아군이 패전한 것을 보면 분함에 떨면서 그 일을 쓰고는 했으며 애통한 말로 효유하는 교서·이첩·공문·격서에 이르기까지 보고 들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얻는 족족 기록하고 간간이 내 개인의 의견을 넣어 연결시켜 글을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조경남 의병장의 유품의 보관한 '경모제'(전북 남원시 이백면)

이는 『난중잡록』에 담은 내용과 그렇게 담게 된 저자의 의도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사대부로서의 절절한 우국충정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조경남 의병장의 저술인 『난중잡록』 한장본(전북 유형문화재 제107호)

현종 7년인 1666년 최시옹(崔是翁)이 저자 조경남 의병장과의 인연을 생각하면서 난중잡록 서(序)를 지었는데, 이 책의 성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생략) 조정의 변고, 민생의 희비, 시운의 성쇠, 세도의 오융(汚隆)에 관한 것을 빠짐없이 실었고, 선악 순역(順逆)을 가리는데 엄격했고, 충신 열사의 사적에 관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다루어서 선한 자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고, 악한 자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였으니 실로 쇠세(衰世)의 한 귀감이다. 세도(世道)에 관계되는바 또한 크도다.”

그 후로 200년이 지난 1856년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이 서문을 쓰면서 “공의 가슴속 핏덩이는 이 기록에 다 쏟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자 조경남 의병장의 열정과 진솔함이 녹아 있는 『난중잡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조경남 의병장의  『난중잡록』 '서'를 지은 노사 기정진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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