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성과로 프랑스·독일·러시아 등도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특히 프랑스는 동양 세계에 세력을 침투하기 전에 일단 천주교를 선교하고, 그 뒤를 따라 대포와 군함 등 무력을 동원하여 침공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전략은 식민지 확장이라는 기본 목표를 저변에 깔고, 거기에 종교적 색채를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후진 지역에 대한 침투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위장 전략이었다.
프랑스가 제국주의적 세력 확장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미국은 이미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854년 3월 미국은 강력한 함포로 위협하여 일본과 미·일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를 지켜 본 프랑스는 크게 자극을 받았고, 일본에 인접한 조선을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게랭(D. Guerin) 제독이 군함 뷔르지니호(Virginie號)를 타고 조선 해역에 진입한 것은 조선에 접근할 구실을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뷔르지니호는 1856년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 충청도 앞바다의 장고도 부근 바다를 오르내리면서 해안선 탐측 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인 1857년 프랑스는 베트남이 천주교 선교의 자유, 통상 대표부 설치, 영사 주재 등 요구를 거절하자 이듬해(1858) 9월 다낭을 점령하고, 1860년 9월에는 군함 70척과 3,500명을 동원하여 베트남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1862년 6월 제1차 사이공 조약(일명 임술조약)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어냈다. 이후로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이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사옥을 일으킨 것은 프랑스 측에 좋은 빌미가 되었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와 리델(Ridel) 신부는 1866년 7월 8일 텐진에 도착한 후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P. G. Roze) 제독을 찾아갔다. 이들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강력히 대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즈 제독이 베트남 사이공으로 긴급 출동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조선 원정 계획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프랑스가 조선 출병을 단행하려하자 청국이 영국 등 열강 공사관에 프랑스 함대의 출병을 만류해 줄 것을 호소하고 나섰다. 이 무렵인 8월 하순경 로즈 제독도 만주 교구장 베롤 주교가 1866년 6월 28일 작성한 출병요청 서한을 전달받고, 병인사옥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청국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은 청국의 총리아문에 청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청국은 이 사실을 조선에 통보해 주었다. 조선은 청국 주재 프랑스 공사관과 청국 정부가 조선 국내에서 일어난 최근 사태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국가 기밀이 국외로 누설된 경위를 조사하는 한편 동일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국경 및 해안지대에 대한 경계태세를 한층 강화했다.
한편 프랑스 해군성은 나폴레옹 3세의 명령서를 9월 7일부로 텐진의 로즈 사령관에게 하달했다. 이에 프랑스 극동 함대는 10여 일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866년 9월 18일 산둥반도의 즈푸항을 떠났다. 프랑스 군함 3척이 조선 해역에 들어와 9월 22일 인천 앞바다 팔미도를 거쳐 작약도로 이동한 후 부근 해역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강화도를 향해 북상하자 강화도와 한강 수로로 연결되는 수도 서울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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