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는 11월 9일 오전 9시경에 이미 척후의 보고를 받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남문과 동문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정족산 어귀에 유인조를 내보냈다. 조선군의 개인화기 사거리가 짧기 때문에 적을 유효사거리 이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전술이다. 유인조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접근해 오자, 시선을 끌어 유인했다.
프랑스군 1개조를 정족산성 동문 쪽으로 유인한 후 주력부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2시경에는 올리비에 대령의 본대가 전방 100 미터 지점에 나타났다. 이때 동문에 배치된 포수 이완보(李完甫)가 프랑스군을 조준사격으로 쓰러뜨렸다. 일제 사격 신호였다. 조선군은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과 양헌수의 효과적인 작전지휘로 적을 타격했다.
올리비에 대령은 부상병을 민가로 후송해 응급 치료하면서 30여 분간 대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장교 5명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부상했다. 출동병력 5분의 1이었다. 프랑스군이 왼손으로 동료의 시체를 끌면서 오른손으로 사격하는 기민한 동작을 보이자 양헌수는 그 용맹성을 높이 평가했다.
올리비에 대령은 실제로 전투가 가능한 80여 명의 병력 만으로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3시경부터 축차적으로 물러갔다. 양헌수는 추격대를 성 밖으로 출동시키려다가 중지했다. 적의 매복조에 의한 피해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양헌수는 부하들의 총상을 직접 입으로 빨고 약을 발라 치료해 주었다.
중국 전국시대 위(衛)나라 장수 오기(吳起․吳子)가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자 그 병사는 죽을 각오로 용감히 싸웠다는 고사가 연상된다. 양근(양평) 포수 윤춘길의 시신 앞에서는 무릎 꿇고 통곡했다. 장수들의 중요한 덕목으로 손꼽히던 ‘부하를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부자지병(父子之兵)’의 참모습일 것이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전한 프랑스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11월 10일(음10.4) 아침부터 퇴각 준비를 서둘렀다. 그날 저녁때까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각종 약탈물과 장비들을 본선에 옮겨 싣고 퇴각 준비를 완료했다.
11일 새벽에 만조가 되자 조선 해역을 빠져나갔다. 한편 프랑스군이 강화 유수부 건물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퇴각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정찰대 보고를 받은 양헌수는 비로소 작전을 종료했다.
이 정족산성 전투는 강화 유수 이인기가 강화성에서 탈출하고 초관 한성근이 문수산성을 포기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강화성에 보관하고 있던 외규장각 도서들이 소각되거나 약탈당했으나 정족산 사고(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할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가 가져다준 소중한 선물이다.
조선 조정은 양헌수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현 서울시 부시장격인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했다. 그리고 선전관을 보내 장병들의 공로를 위로하였다. 양헌수 부대는 강화 유수부로 이동한 후 주민을 위무하고 전후 복구에 힘을 쏟았다. 14일에는 전후 복구 사업을 총괄할 '심영영조도감'이 설치되자 양헌수는 최고 책임자인 감동당상 6명에 포함되었다.
고종은 11월 26일이 천총 양헌수와 출정군을 창덕궁 춘당대에서 사열하고 공로에 따라 포상하였다. 기보연해 순무영이 임무를 종료하자 장병들도 원대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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