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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3) - 국왕 지명을 받은 12세 소년 이명복

by 헬나이트 2020.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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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후계자를 받아들이되 누구의 법통을 승계하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간에 인식을 달리하고 있었다. 즉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가 자신의 남편인 익종의 대통을 승계하도록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헌종 왕비 홍씨는 헌종을 승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철종 왕비 김씨는 당연히 철종의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집터에 세워진 용흥궁(강화읍,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

세 왕비는 궁궐에서 왕손을 영입할 경우 자신의 남편을 승계하게 함으로써 수렴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배후에는 조두순·홍순목 등과 같은 친정 종친 세력의 유력 인사들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국왕 교체기에 실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재위 14년 만에 서거했다. 조대비의 왕위계승자 지명은 매우 전격적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방침을 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조대비와 흥선군의 사전 묵계에 따라 이명복이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력의 반대에 직면했다.

철종 재위(1850-1863) 때 영의정을 역임하고 안동 김씨 세력의 좌장격인 김좌근과 김흥근이 조대비의 조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명복의 생부가 아직 살아있으므로 그 동안 조선에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흥선군을 예우하는데 따르는 여러 문제점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다.

김좌근 고택(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경기 민속자료 제12호)

더구나 흥선군의 성품이 좋지 못한데 태상의 존귀함을 믿고 조정 정사를 어지럽게 하면 국가에 큰 우환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박제형 저, 이익성 역 『근세조선정감』상, 탐구신서 79, 1984, 32쪽) 즉 흥선군의 존재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헌종의 어머니 조대비가 왕실의 최고 존장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흥선군의 제2자 이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승계하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교지에 따라 영중추부사 정원용이 원상에 임명되어 나이 어린 국왕을 보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고종(이명복) 사진

원상 정원용의 첫 번째 임무는 흥선군의 사저로 행차하여 새 국왕을 궁궐로 모시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호를 익성군으로 하되, 이를 좌부승지 서승보가 전달하고, 익성군이 입궐할 때까지 각 군영에서 선발한 군사를 급파하여 흥선군 사저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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