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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6세기 말 해양세력 일본의 대규모 침략(임진왜란)을 받고 산성이나 읍성에서의 공방전을 이용해 상륙을 저지하거나 북상을 억제하지 못했다. 특히 읍성은 소규모 왜구의 기습적 노략질에는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 침공 때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발발 후 불과 2개월이 경과한 6월에는 평양성을 점령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명군과 조선군이 공성전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북쪽에서 남침하는 적을 방어할 때와는 정반대로 공성과 수성이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첫 공방전에서는 성문을 열어 놓고 유인하는 일본군의 대담한 작전에 말려들어 실패하게 된다.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참전한 명군과 조선군의 평양성 공성전은 1593년 1월 다시 전개되었다.
명군 대병력이 참전하여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북병이 대포로 성문을 파괴하고, 보병인 남병이 공성기구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작전에 성공하자 조선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일본군을 남쪽으로 압박했다. 그리고 공성전 과정에서 확인된 남병들의 대왜구 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계기로 삼았다(참고문헌:반영환, 『한국의 성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강성문, 「조선시대 남한산성 관방론」,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봉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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