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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병인양요 당시 조선 주변의 시대상황(feat. 포함외교)

by 헬나이트 2020.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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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는 17세기 초 명나라에서 서양의 과학 문명과 함께 유입되어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천주교가 몰락한 양반과 중인층은 물론 상민과 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확산되자 18세기 후반부터는 사상적 혼란에 빠져들었다. 조선 지배층은 불안했다. 장차 조선 사회의 전통적 신분질서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결국 1785년(정조 9) 천주교 포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천주교 선교 기록화

1800년 정조(正祖)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한 이듬해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模)와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유배 혹은 처형당하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이 발생했다. 그리고 1836년(헌종 2) 1월 이후로 비밀리에 입국한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의 선교활동으로 신자가 급증하자 조야에 강경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와 군부의 비호를 받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이었다.

당시 조선 교구는 1831년 베이징(北京) 교구에서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교황청이 조선 교구에 대한 관리를 위임했기 때문이다. 앙베르․모방․샤스탕이 서양인 선교사로서 조선에서 최초로 처형되고, 80여 명의 신자들도 처형당하는 1839년 8월의 기해사옥(己亥邪獄)이 프랑스를 자극하는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1854년 3월 미국이 포함외교(砲艦外交)로 일본을 강제로 개국시키고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사태에 자극을 받았다.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게랭(D. Guerin) 제독이 군함 뷔르지니호(Virginie號)도 1856년 7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 충청도 장고도(長古島) 부근 일대에서 탐측활동을 벌였다. 이듬해 베트남에 천주교 포교의 자유, 통상 대표부 설치, 영사 주재 등의 요구가 거절되자 1858년 9월 다낭을 점령하고, 1860년 9월 군함 70척과 육군 3천 5백 명을 급파하여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결국 1862년 6월 제1차 사이공 조약(일명 壬戌條約)을 체결하여 포교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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