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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1)-해외 파병 역사의 이해

by 헬나이트 2020.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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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대외파병은 ‘파병’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다른 나라와 연합작전을 염두에 둔 파병이라면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元)나라 몽골군과 일본 원정에 출병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그린 전투기록화 '몽고습래회사'

13세기 이후로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7백여 년의 파병 역사가 있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과 군사적 상황은 제각기 달랐다. 자위적 수단으로 출병하는 경우는 연합군을 편성하기 보다는 단독으로 작전을 벌였다. 주변 강국의 요청에 따라 무리한 출병을 단행한 경우는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파병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자주권이 크게 제약되어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례가 많았다. 불가피한 파병은 전장에 출동하는 군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많은 고통이 뒤따랐다. 특히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몽골군의 일본 원정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명(明)나라의 요청에 따른 15세기 후반 두 차례 여진족 정벌군 파병은 조·명 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고려한 파병이기 때문에 몽골군의 일본 원정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별도의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

제2차 여진정벌 상황도(1479)

그리고 17세기 전반에 추진된 명군과의 후금 정벌 작전은 앞서 16세기 말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파병했던 명에 보답하는 성격의 파병이라는 측면에서 특징이 있다. 한족 국가인 명나라 파병 요청은 주로 군사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특히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도 조선의 위상이 강화되고 있던 조선 전기 세조·성종대에 추진됨으로써 다른 파병사의 경우와 차이가 있다.

17세기 중반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나선(러시아) 정벌군을 파병한 경우도 고려 때 일본 원정군 지원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작고, 출병 준비에 따른 부담도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일방적 요청에 의해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정치·군사적 환경은 앞서 고려 때의 경우와 흡사한 점이 많다.

제2차 나선정벌 상황도(1658)

그 후 3세기를 뛰어넘어 20세기 후반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전쟁이 격화되자 ‘공산주의 차단이 곧 한반도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일부 반대도 있었으나 결국 국회 동의를 받아 제1차로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함으로써 20세기 파병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전투 부대가 추가로 파병되었다. 1971년 12월부터 1973년 철수를 완료하기까지 8년 반 동안 육해공군 연인원 325,500여명이 참전했다. 인명 피해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우리 역사상 최장기간 최대 규모의 베트남 파병을 통해 국군의 전투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실전경험을 축적했다. 정치·외교·경제적으로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창출함으로써 국위 선양과 국력신장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베트남 파병부대 환송식

그 후로 우방국과의 안보협력 차원에서 군의 역할이 한층 증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90년 쿠웨이트를 무력 합병한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제재조치가 단행되는 가운데 미국이 국군의 파병을 요청해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나 이른바 다국적군으로서 1991년 의료지원단 154명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병했다. 이어서 공군 수송단 160명을 항공기 5대(C-130)와 함께 아랍에미리트(UAE)에 파견했다. 비록 1~2개월 만에 복귀했으나, 중동 특유의 지형 및 기상조건에서 초현대전을 체험하고 국가와 군의 위상을 아랍권에 각인시켰다.

1991년 9월,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했다. 회원국으로서 경찰과 민간인들도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함으로써 파병 역사에 새로운 선례가 되었다. 평화유지 활동에 파견된 국군은 소말리아․서부사하라․앙골라․그루지야․인도/파키스탄․동티모르․사이푸르스 등지에서 유엔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이들 국가의 경제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국익 증진의 기회도 확보했다. 다양한 군사 경험을 축적하고, 타국군과의 연합 작전 능력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동티모르 파병 상록수부대 제2진 환송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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