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출범한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1950년 북한군의 남침공격을 받았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과 중공군을 물리쳤다. 10여 년 후인 1964년 베트남에서 전쟁이 격화되었다. 같은 분단국인 ‘베트남에서 공산주의를 차단하는 것이 곧 한반도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지원군 파병을 요청해왔다. 대한민국은 그 해 9월 1차로 140명 규모의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했다. 이어 전투 부대를 수차례 파병하게 되었다.
1971년 12월 1단계 철수가 시작된 이래 1973년 파리 휴전협정 체결에 따라 그해 3월 철수를 완료했다. 8년 반 동안 육해공군 연인원 325,500여명이 참전해 5,000여 명 사상자가 났다. 파병 역사상 최장기간 최대 병력을 투입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실전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정치․외교․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창출했다. 대한민국과 국군의 위상이 크게 고양되자 국제적 역할 분담도 새롭게 요구되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자 미국을 비롯한 유엔 동맹국들이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 미국의 요청과 유엔의 결의를 존중하여 다국적군으로 참가했다. 1991년 1월에 의료지원단 154명을 사우디에 파병하고, 2월에는 공군 수송단 160명을 항공기 5대(C-130)와 함께 아랍에미리트연합에 파병했다.
의료지원단은 79일, 수송단은 불과 37일 만에 돌아왔다. 중동 특유의 지형 및 기상조건에서 초현대전을 체험하고, 한국의 이미지를 아랍권에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9월 대한민국은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유엔 회원국 자격으로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하면서 파병 대상국도 증가하고, 기간도 늘어났다.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경찰과 민간인들도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했다. 국군은 소말리아에서 철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서부사하라․앙골라․그루지야․인도․파키스탄․동티모르에 주둔하면서 작전을 벌였다.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더 한층 공고히 하면서 국익 증진의 기회도 확보하게 되었다. 다양한 군사 경험을 축적하고 연합 작전 능력을 향상시키는 전술적 이득도 소중한 성과였다.
역사적으로 군대를 나라 밖으로 파병한 경우는 대체로 주변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정치․외교적인 차원에서 국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나 조선을 막론하고 연합군의 성격을 띤 파병에서는 주변 강국의 강요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선조들은 대의명분과 국익을 위해 실리적인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때로는 찬반양론으로 대립하여 심한 갈등도 빚었다. 수많은 전쟁 물자를 자급해야 하는 고통도 뒤따랐다. 파병의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 베트남과 PKO 파병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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