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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전쟁이야기

1-1. 우리나라 성곽 축조의 배경

by 헬나이트 2020.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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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성곽이 처음으로 축조하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이민족과의 충돌이 빈번했던 북쪽 지역에서 먼저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대륙의 동서로 연결되는 만리장성이 특히‘ 천고마비(天高馬肥:북방민족이 살찐 말을 타고 남쪽 농경민족의 수확물을 약탈하는 고통스러운 시기가 됐다는 의미로 사용됨)’의 계절에 북방 유목 기병의 남침 약탈을 막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조선의 경우는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의 침공에 대항하면서 이미 장기간 성곽 공방전을 전개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1∼2세기 무렵에는 남쪽 지방에서도 삼국간에 영토 확장 전쟁의 교두보로서 군사요충지에 성곽을 축조하여 공방전을 전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주요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거나 점령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교통 요지에 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에는 주로 목책(木柵)을 이용하여 외적을 방어함에 따라 목책이 공방전의 중심에 있었다. 목책은 작전 지역 주변에서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기간에 넓은 지역에 설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화공이나 비바람에 취약하여 장기적인 방어시설물로서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목책의 취약점을 보완하면서 비교적 견고한 토성(土城)을 축조함으로써 토성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적 방향의 외곽 지역을 깊게 파서 토성을 축조함으로써 지상으로부터 높은 토벽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외곽지역을 해자(垓字)나 장애물로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방어 효과를 배가할 수 있다. 주로 평지에 축조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화공에 강한 장점도 있으나 역시 풍우에 취약한 한계가 있다.

아차산과 한강 건너편 풍납토성(191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백제 풍납토성(서울 송파구, 사적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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