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전반 건주여진의 누루하치(奴兒哈赤)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大金:1616)을 세웠다. 조선은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전통적 우방국 명(明)의 관계도 고심거리였다. 후금은 1618년부터 여진족의 ‘칠대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만주지역의 요충인 무순(요녕성 무순시)과 청하(요녕성 청하 만족자치현)를 점령하며 명을 압박했다.
앞서 조선은 16세기가 저물어가던 1592년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때 명군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큰 빚을 졌다.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는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전쟁 후유증은 여전했다. 그런데 또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뛰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국왕 광해군은 제3자로 관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명의 압박과 조정 중신들의 파병 주장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후궁 소생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서둘러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국왕이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입지도 그다지 견고하지 못했다.
국왕 광해군은 불가피한 출병을 결심했다. 동시에 후금과 원한관계를 맺지 않을 방안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극비 특명을 내렸다는 의혹이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조선군은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15,500명이 편성되었다. 문관 출신 강홍립을 도원수에 임명한 것은 여러 상황을 고려한 결과였다. 강홍립은 통역관 출신인 부친에 이어 명군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었다. 명군 지휘부와 소통하며 전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그 만의 장점이었다.
1619년 1월과 2월에 명의 지휘관 유정(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은 만주 지역에 진입하자마자 조선군 진영에 감독관을 보내 재촉했다. 조선군 지휘권을 명군 지휘부에 이양하는 형식적 절차도 없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을 지휘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지휘부는 독촉을 받고 행군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겨우 개인 필수 장비만 휴대하고 행군속도를 높이다보니 보급품 수송대와 멀리 떨어졌다. 식사도 제때 할 수 없었다. 험한 산악지형과 크고 작은 하천을 도하하며 10여 일 간 강행군했다. 최종 공격목표인 수도 흥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기진맥진한 조선군은 환인(혹은 회인)을 우회하는 험준한 지름길을 선택하여 혼강(渾江)의 지류가 통과하는 부차(富車, 혹은 부찰富察, 부사富沙)라는 곳이 이르렀다. 혼강은 환인을 돌아 압록강에 들어가는 강이다. 환인에서 서북방으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인 부차에서 명군 남로군 주력이 후금 기병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하천을 따라 길게 형성된 개활지에서 전개된 3월 2일의 소규모 전투와 4일 명군과 조선군이 후금군을 맞아 싸운 일련의 전투를 ‘심하 전투(혹은 사르후 전투)’라 부른다. 이는 환인을 돌아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혼강의 지류를 ‘심하(혹은 삼하)’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을 쏘면서 대응했다. 부차(부찰) 들판의 모래 강풍 때문에 화약에 불을 붙일 수 없는 틈에 후금 기병이 쳐들어왔다. 조선군 다수가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이때 후금군이 보낸 서신을 받았다. 조선과는 서로 원수진 일이 없으니 더 이상 싸우지 말고 교섭을 벌이자는 제안이었다. 도원수 강홍립은 부원수를 후금 진영에 파견하여 화약을 체결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인명손실이 발생하지 않았다. 주력군인 명군이 무너져 승패가 이미 갈라진 상황에서 조선군이 전멸을 자초할 이유는 없었다.
심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로도 명은 조선군의 참전을 재차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은 심하 전투의 결과를 빌미로 더 이상 출병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화의 교섭은 후금군의 보복적 침공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심하 전투가 국왕 광해군과 그 지지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강화시켜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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