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Ⅳ 조경남 『난중잡록』의 사료적 가치

by 헬나이트 2020. 12. 18.
728x90
반응형

 

『난중잡록』 저자 조경남의 11대 맏손자인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하면서 『난중잡록』 초본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대부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내기도 한 조경남의 『난중잡록』이 수정실록 편찬에 참조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실록 수정 작업이 끝난 후에 원본은 1657년(효종8) 본가로 반환되었고, 부본은 정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부에 부분으로 남아있던 『난중잡록』이 1909년〜1911년에 고서간행회가 『대동야승』을 간행할 때 제26권부터 34권까지 9책으로 간행하는데 대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대방기문(帶方記聞)』, 『동국춘추』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왕조 개국 이래 200년 만에 겪는 남왜의 침입과 그로 인한 후유증에 이르기까지 근 30여년 역사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이 이 책의 외형적 가치일 것이다. 이와 아울러 내용면에서도 정치·사회·군사·제도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책의 사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특징은 문무를 겸전한 의병장으로서 활약했던 저자가 전란 체험을 저변에 깔고 일기 형식으로 기술하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1964년에 후손들은 보관하고 있던 『난중잡록』 4권 4책을 춘·하 2책으로 재편집하고 여기에 『속잡록』 4권 4책을 역시 추·동 2책으로 재편집하여 총8권 4책으로 석판(石版) 영인하였다. 이때 1864년에 기정진이 쓴 「난중잡록서」와 1666년에 최시옹이 쓴 「난중잡록서」, 그리고 저자가 1618년 7월 16일 쓴 서문을 차례로 첨부하고, 말미에는 한익철의 발문과 11대 종손 조태희의 간행사를 붙였다.

1967년에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세 사람의 서문을 포함하여 번역한 국역본을 『대동야승』제26권부터 제29권에 걸쳐 간행 배포함으로써 연구자들의 활용을 한층 용이하게 해주었다. 이때 『속잡록』은 제30권부터 제34권에 걸쳐 국역되었다. 이러한 석인본을 저본으로 하여 1977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구두점을 찍고 색인을 후미에 달아 『난중잡록』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고전총서』(3)으로 영인·간행하였다.

『대동야승』 국역본

이밖에도 저자 조경남 선생은 『제례의』1권(1611), 『성리석』1권(1613), 『오상론』1권(1622), 『소견록(消遣錄)』상편(1622), 『소견록』중·하편(1628), 『속잡록』4권(1638) 등 많은 저서를 후세에 남겼다. 『속잡록』이 완성되자 『난중잡록』과 합본하였는데, 책의 명칭은 『산서잡록』, 『산서야사』, 『대방기문』, 『동국춘추』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저술들은 저자 조경남 선생의 유학적 소양과 아울러 뛰어난 문재(文才)를 입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난중잡록』의 저자 산서 조경남 선생 초상화(부분)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