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0일 그동안 미루던 원균 장군 묘역을 답사했다. 용인 이동면 사는 친구의 안내로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한 원균 장군의 묘역과 관련 유적들을 답사했다.
원균 장군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참전하고,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출전했다가 전사하신 무장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인물이다. 그리고 원균 장군의 공과에 대해 많은 편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많은 무인들이 있었으나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분은 매우 적다. 무인적인 기질로 인해 기록을 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결과 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기록을 남기신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들은 이때 남긴 기록으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무인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늘 원균 장군의 묘역을 참배하고 주변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은 왜란을 극복하는데 목숨을 던진 한 무장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조경남 의병장은 자신의 저작인 『난중잡록』에서 원균 장군을 비난하는 무리들에 대해 "전장에서 전사한 원균에게 죄를 준다면, 적을 피해 도망이나 다니면서 목숨을 부지한 자들에게는 무슨 죄를 주어야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전장에서 도망을 다니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싸우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번 답사에서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원균 장군의 집안이 대대로 무인 집안이다 보니 많은 일족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이다.
원균 장군의 묘소에는 시신이 안장되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애마가 남해 바닷가 전장에서 이곳 고향집으로 달려와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안장에는 장군의 신발과 담뱃대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주인이 전사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 숨을 거둔 애마의 무덤도 원균 장군 묘역의 한 자락에 조성되었다. 그 연원을 기록한 비석이 애마총 앞에 서 있다. 정작 원균 장군의 묘역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군의 유품으로 초혼하여 매장하는 것으로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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