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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작은 역사, 일상

거문도에 찾아온 장기체류 손님, 영국 함대

by 헬나이트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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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2월, 제정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의 펜자드(Penjdeh)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이 우려하고 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더욱 예민해졌다. 조선 동해안 영흥만을 조사한 러시아인이 1884년 이곳을 ‘나자레프항(Port Lazareff)'으로 명명하는가 하면, 장차 해군이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이 영국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시켰다.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중앙 흰색건물)와 군함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국은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톡항을 모항으로 하는 러시아 군함들을 감시하기 좋고, 유사시에 신속히 대응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안 차단시설 공사중인 영국군과 서도와 왜도의 러시아 함대 방어용 목책(대위 A.CWoods촬영, (김재승, 『근대한영해양교류사』 220~221쪽)

앞서 1845년 영국 해양탐사선 사마랑호를 타고 제주도와 거문도 해역을 탐사한 에드워드 벨처 함장이 1848년 『사마랑호 탐사항해기』를 간행한 후로 근 40년 세월이 흘러간 시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극동함대 소속 1등 장갑순양함 류리크

영국이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은 청나라 외교가에 널리 퍼져있었다. 청국에 파견된 영선사 김윤식이 이홍장과 조·미수교 문제를 논의하던 1881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김윤식은 숙소로 돌아와 지도를 살펴보았다. 강화도 서쪽 ‘주문도’를 영국인들이 거문도로 잘 못 발음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김윤식이 추정한 주문도의 현재 위치

그리고 조·영수호조약이 체결되던 1882년에 영국은 거문도 조차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이 때 조선측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더 이상 진전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영국은 내심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885년 4월 11일 내각 결의를 거쳐 14일 주중 영국 함대 사령관 해군 중장 윌리엄 도우웰(W. Dowell) 제독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도우웰 제독의 기함 아가멤논호(김재승, 『근대한영해양교류사』 72쪽)

4월 15일부터 전개된 영국 해군의 거문도 상륙 작전에는 아가멤논호(HMS Agamemnon, 총톤수 8,510톤)를 주력으로 페가수스호(HMS Pegasus, 총톤수 1,130톤)와 파이어브랜드호(HMS Firebrand, 총톤수 455톤)가 투입되었다. 함포 76문과 병력 600명으로 거문도에 상륙한 후 그들 나름대로 서도를 ‘Sodo’로, 동도를 'Sunhodo'로, 왜도를 ‘Aito’라고 새 이름을 지어 불렀다.

왜도 앞바다에 정박중인 페가수스호(김재승, 『근대한영해양교류사』 214쪽)

영국 대리 총영사 윌리엄 칼레스(W.R.Carles)는 1885년 4월 24일 조선의 교섭통상사무 김윤식에게 비밀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영국 주재 청국 공사 증기택이 4월 16일에 이 사실을 영국 정부로부터 통보받고 본국에 보고했으나 정작 조선은 1주일이나 지나서 거문도에 영국군이 상륙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관복 입은 통상교섭사무 김윤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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