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소재지다. 19세기말 열강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거문도는 당시 조선 국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남해의 외로운 섬이었다. 가장 큰 섬인 서도와 두 번째 큰 동도에만 주민들이 살았다. 두 섬에는 각각 2개의 자연부락에 2천 여 주민들이 어업과 농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악한 생활수준은 여느 섬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작은 섬 거문도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외국 선박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부터다. 1845년 6월 하순부터 7월 중순에 걸쳐 영국 해양탐사선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거문도 해역을 탐사하고 돌아갔다.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 함장은 1848년 『사마랑호 탐사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of HMS Samarang)』를 간행했다. 이 항해기에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하면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항해기는 동아시아 항해를 준비하는 해운업자들에게는 필독서로 각광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해밀턴항으로 알려진 후 거문도를 찾아온 첫 손님은 뜻밖에 러시아 군함이었다. 1854년 4월 전함 팔라다(Pallada : 2,284톤)호를 비롯한 포함 2척과 비무장 보급선 2척이 2일부터 7일까지 거문도에 머물렀다. 당시 명망 높은 유학자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김류(金瀏, 1814〜1884, 아호:귤은재)가 주민을 대표하여 필담으로 접촉을 시작했다. 러시아 군함에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신부가 승선하고 있어서 김류와 필담을 나누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귤은 김류는 거문도 동도 귤동(橘洞 : 삼산면 유촌리) 출신으로 당대의 거유 노사 기정진(1789〜1879)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청산도와 여호도 등에도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본래 ‘거마도’ 등으로 불리던 섬이 ‘거문도(巨文島)’로 불리게 된 것도 김류와 같은 학덕이 높은 큰 선비가 사는 섬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1세의 특사 뿌쨔찐(E.B ПУТЯТИН) 제독의 보좌관 곤차로프(1812〜1891)가 남긴 기록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기개가 대단한 노인'으로 인식했던 분이 바로 김류 선생일 것으로 짐작된다. 주민들은 러시아 군함에 초대받아 술과 다과를 대접받고 피아노 연주도 감상하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 보드카가 14〜15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으니 이들도 보드카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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