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완당'이라는 아호도 흔히 사용한다. '추사체'라는 독보적 글씨체로 우리에게 친근한 분이다. 충청도 예산 신암 용궁리에서 1786년(정조 10) 태어나 1856년(철종 7) 향연 70세를 일기로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했다.
추사 선생은 순조 임금 때 5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노경은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명필의 재능이 아들 김정희에게 대물림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의 증조할머니는 영조의 따님인 화순옹주였다. 그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여 백부인 김노영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데 생부가 고금도에 유배되었던 그 사건에 김정희도 연루되자 1840년(헌종 6)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9년여 동안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석방 후 1851년(철종 2) 다시 함경도 북청에 2년 동안 유배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에게는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라는 호칭 외에도 금석학자, 고증학자, 실학자 등과 같은 다양한 호칭이 따라다닌다. 북한산 비봉에 우뚝 서있던 그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낸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비봉에는 3D로 복제한 비석이 대신 서있다.
추사는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거쳤다. 적막한 유배지에서는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한양의 최고 지식인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이었다. 더없이 좋은 기회며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추사가 지역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재능 기부를 한 셈이다. 오늘날 제주도가 차 생산지로 유명해진 것도 차의 명인인 추사가 제주 도민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일 것이다.
추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자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한 이상적(1803~1865, 아호:우선)은 통역관으로 이름을 날린 분이다. 그는 북경을 출입하면서 아주 희귀한 서적을 구입해 추사에게 선물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1844년 이상적에게 그려 준 선물이 '세한도(歲寒圖)'라고 한다. 국보 제18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추사 선생이 살았던 대정현의 집은 신천 강씨 혹은 제주 강씨로 불리는 강도순의 집이었다. 강도순의 입도 시조인 강영 선생도 조선 태종에 의해 제주 조천으로 귀양 와서 후학을 양성하며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그는 오늘날 '제주 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강도순의 집은 1948년에 불타버렸다. 1984년에 복원되었는데, 강도순 증손자의 고증에 따랐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2020년 12월 21일에도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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