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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도3

격동의 19세기 조선(11) - 강화 유수부가 프랑스 함대에 점령 프랑스 극동 함대는 조선 해역에서 탐측활동을 마치고 1866년 10월 3일 즈푸항으로 돌아갔다. 10월 6일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해군성 장관에게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극동함대 사령부가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감행하여 조선측에 천주교 박해를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프랑스 극동함대는 청국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으로 군함 7척에 1천여 명의 원정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10월 11일 즈푸항을 떠나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해상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14일 4척으로 함대를 재편성하여 작약도에서 강화해협을 30여 ㎞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어서 병력을 3.. 2022. 10. 21.
격동의 19세기 조선(10) - 조선 해역에 나타난 이상한 배 ‘이양선’ 1866년 9월, 이른바 ‘이양선(이상한 모양의 선박)’으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선박들이 수도 한양으로 연결되는 한강에 나타났다. 처음 보는 이상한 모양의 배라서 그냥 '이양선'으로 통칭했다. 김포 군수 정기화는 현장에 출동하여 국적과 항해 목적을 물었다. 물론 배 안에는 통역이 타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함대는 식료품을 공급해 달라고 요구했고, 조선은 인도적 차원에서 그 요청을 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기는커녕 도성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왔다. 이에 조선은 무력으로 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66년 9월 26일 아침 조선군 선단은 프랑스 함대의 진로를 가로 막았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의 집중 포화를 맞고 붕괴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프랑스 함대는 양화진을 거쳐 서강 어귀까지 거침없이 항.. 2022. 9. 27.
격동의 19세기 조선(9) - 프랑스 함대의 침입과 서울의 위기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성과로 프랑스·독일·러시아 등도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특히 프랑스는 동양 세계에 세력을 침투하기 전에 일단 천주교를 선교하고, 그 뒤를 따라 대포와 군함 등 무력을 동원하여 침공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전략은 식민지 확장이라는 기본 목표를 저변에 깔고, 거기에 종교적 색채를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후진 지역에 대한 침투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일종의 위장 전략이었다. 프랑스가 제국주의적 세력 확장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미국은 이미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854년 3월 미국은 강력한 함포로 위협하여 일본과 미·일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를 지켜 본 프랑스는 크게 자극을 받았고, 일본에 인접한 조선을 주목하게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게랭.. 2020.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