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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인물과 사건

격동의 19세기 조선(11) - 강화 유수부가 프랑스 함대에 점령

by 헬나이트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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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극동 함대는 조선 해역에서 탐측활동을 마치고 1866년 10월 3일 즈푸항으로 돌아갔다. 10월 6일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해군성 장관에게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극동함대 사령부가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감행하여 조선측에 천주교 박해를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즈 제독
강화유수부 동헌(1894년 콜웰 촬영)

그 후 프랑스 극동함대는 청국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으로 군함 7척에 1천여 명의 원정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10월 11일 즈푸항을 떠나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해상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10월 14일 4척으로 함대를 재편성하여 작약도에서 강화해협을 30여 ㎞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어서 병력을 3개 제대로 재편하여 상륙했다.

해상에서 바라 본 작약도(물치도)
갑곶진 소속의 갑곶돈대 당시 모습

강화 유수부는 10월 14일 저녁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불법 상륙한 사실을 탐지했다. 김재헌(종4품)을 프랑스군 진영에 급파하여 엄중 항의하고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 로즈 사령관은 협상을 벌일 조선측 관원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대담을 거부했다. 이어 15일부터는 정찰부대를 강화 읍성의 동문 쪽으로 투입하여 정찰을 실시했다. 강화성 동문의 조선군 수비 병력은 소총과 소구경 대포로 집중 포격하여 프랑스군의 접근을 막았다.

포격전의 현장, 강화성 동문(망한루)의 복원된 모습

그러나 무기의 성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단시간에 타격을 입었다. 군관 조무영 등이 전사하고 결국 후방으로 퇴각했다. 동문과 남문을 점령하고 강화 읍성에 진입한 프랑스군이 정찰을 마치고 물러가자 강화성의 조선군은 다시 동문과 남문을 장악하고 방어태세를 가다듬었다. 이튿날 10월 16일 8시 갑곶나루를 출발한 프랑스군 본대가 강화성으로 쳐들어오자 화력이 열세한 조선군은 타격을 입고 후방의 서문쪽으로 물러갔다.

강화성 남문의 옛모습("강도남문")
강화성 남문, 안파루의 복원된 모습
강화성 서문, 첨화루의 복원된 모습

이로써 조선의 수상관문이며 한강수로의 요충인 강화성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수도 서울과 ‘순치(입술과 이빨)’의 관계인 강화도가 프랑스군에게 무력으로 점령당하자 수도권 일대에 긴장이 크게 고조되었다.

강화성 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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