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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2

5.조선전기 성곽 축조와 공방전 양상(1)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평안도와 함경도의 주요 거점에 축성하여 요새화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특기인 기병전술에 대응해 장병전술을 발전시켰다. 전 왕조인 고려 말기부터 서남해안 일대에서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으나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부터 주로 연해 지역에 소규모 읍성을 견고한 석성으로 개축하여 대비했으나, 국가적 관심은 여전히 북쪽에 집중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산성은 청야입보 기능을 최우선으로 하며, 인마의 출입이 불편한 지형과 지세가 가장 중요한 입지 조건이었다. 즉 산림이 울창하고 벼랑과 바위가 많으며, 식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지형이 최적지였다. 이 같은 지형은 수성군에게 은폐와 엄폐를 제공해 주지만 공성군에게도 유리한 조건이다. 따라서 공성부대는 성.. 2020. 6. 26.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3)-조선의 대마도 왜구 정벌군 파병 1392년 출범한 조선은 건국 초기에 왜구의 소굴을 소탕할 원정군을 편성했다. 고려말기부터 서남해안에 출몰해 극성을 부리던 왜구는 이미 사회 혼란의 주범이 되고 있었다. 조선 건국자들은 고려 멸망이 왜구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 혼란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여진이나 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교린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국시와도 같은 대외 정책이 위협을 받게 되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앞서 13세기 후반 고려군이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파병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편성해 1419년 왜구의 소굴 대마도로 쳐들어갔다. 이른바 ‘기해동정’으로 불리는 조선군의 출병은 1419년 5월에 왜선 40여 척이 충청도 해안에 쳐들어와 약탈․방화한 사건이 계기가.. 2020.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