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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하2

격동의 19세기 조선(12) - 조선 조정이 수립한 비상대책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진 강화 유수부를 탈환하기 위한 대책은 10월 18일 중신회의에서 논의되었다. 각 도에서 모집한 의병을 서울로 집결시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소모사를 전국적으로 파견하는 계획도 세웠다. 이 무렵 통진부도 프랑스 군에게 무혈로 점령당했다. 통진부의 주요 관수품이 약탈당하고 관아가 모두 불탔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조정이 처음부터 프랑스 함대를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함대가 조선 영해를 침범하여 강화 해협을 거슬러 올라오자 수도 서울에 접근하기 전에 대화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10월 15일 강화성 동문이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에 무의미해졌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훈련대장 이경하와 총융.. 2022. 10. 25.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4)-국가위기를 두 어깨에 진 천총 양헌수 조선은 1866년 천주교 신자 8천 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인해 프랑스 함대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한강 하구의 염창항(鹽倉項,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치된 차단선을 뚫고 서강 입구까지 들어왔다가 10월 3일 산둥반도의 지부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 1천 여 명을 군함 7척에 싣고 10월 11일 로즈(Rose) 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부항을 떠났다.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인근에 정박했다. 14일에는 강화해협을 30㎞나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동북단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강화 수로 양안에 있는 돈대 및 포대를 병인양.. 2020.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