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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안성2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二) 1595년 이후 언젠가 『난중잡록』을 보완할 때, 웅치전투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이 글을 삽입함으로써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한 사례다. 저자 조경남 의병장의 이 같은 편집 방법에 의하면 『난중잡록』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수정·보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전주의 경기전에 모시고 있던 어영(御影)을 옥구에서 뱃길로 피난시켰다가 1614년 9월 18일에 다시 전주로 옮겨왔다는 기록은 이때까지도 『난중잡록』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단서다. 『난중잡록』 제2권은 임진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불과 11개월 기록인데, 4권 중에서 가장 적은 분량이다. 그러나 11개월 기간으로 제3권의 5년 6개월 기록 분량과 비교하면 4배며, 제4권에 비하면 무려 9배 많다. 이는 .. 2020. 12. 8.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一) 왜란이 발발한 임진년(1592) 4월의 후반부 17일간 조경남 『난중잡록』의 기록은 왜군의 침입과 북상, 관군의 어이없는 대응, 곽재우 의병의 봉기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면서 초기 상황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특히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척후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을 “척후의 정탐은 병가의 요략(要略)”이라고 지적하며 비판한 것은 조경남 의병장의 병법에 관한 이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신립이 충주에서 패전한 소식이 들리면서 수라장이 된 도성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천지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흉악한 왜적에게 마저 부끄러움을 느낀다.”라고 조경남 의병장은 탄식했다. 이 같이 관군의 무력함에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부분은 『난중잡록』에 자주 보이는 기록이다. 선조가 4월 말에 도성을 떠.. 202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