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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2

‘해주석씨’와 항일 의병장 석상룡(石祥龍)을 아시나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포상정보’에는 석상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07년 함양 일대에서 5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진을 구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주변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양한규(梁漢奎)·고제량(高濟亮)·문태수(文泰洙, 泰瑞) 의병장 등과 제휴하여 함양·산청·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지리산을 본거지로 삼아 왜적 다수를 살상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11년 체포되었다. 5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16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을 모아 일제에 항거했던 의병장 석상룡은 황해도 해주를 본관으로 하는 해주 석씨다. 그의 선대도 3백 여 년 전 임진년(15.. 2021. 1. 12.
격동의 19세기 조선(7) -‘서학(천주교)’의 확산과 박해 사건 조선에 전파된 천주교는 서양인 선교사의 포교 활동에 의한 일반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즉 청국에 왕래하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서 국내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조선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전래되자 서구의 새로운 학문 체계라는 점에서 진보적 유학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청국에 들어온 서양의 과학 문명과 함께 ‘서학’으로 불리면서 학문적·사상적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몰락한 양반과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교세가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양반 사회가 붕괴하는 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상민과 천민 계층에까지 광범하게 확산됨으로써 대중 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천주교는 급속도로 그 저변을 확대해 나가면서 차츰 양반관료 중심사회.. 2020.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