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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사옥2

격동의 19세기 조선(8) - 정치적 변화, 짧았던 밀월관계 1849년 헌종을 이어 철종이 즉위한 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되었다. 청나라에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1857년(철종 8)에는 천주교 신자가 13,000여 명에 이르고, 1860(철종 11) 이후로는 18,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1861년에는 서울과 그 부근 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치되었다. 천주교 서적들이 출판되어 보급이 확대되자 궁녀나 왕실 부녀자들도 신자가 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1863년(철종 14) 12월 고종이 즉위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하는 가운데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주교계와 우호적 관계가 형성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즉 국내적으로는 새 국왕의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강대국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해.. 2020. 9. 1.
충장공 양헌수와 병인양요(4)-국가위기를 두 어깨에 진 천총 양헌수 조선은 1866년 천주교 신자 8천 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인해 프랑스 함대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한강 하구의 염창항(鹽倉項,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설치된 차단선을 뚫고 서강 입구까지 들어왔다가 10월 3일 산둥반도의 지부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청국과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한 해군 1천 여 명을 군함 7척에 싣고 10월 11일 로즈(Rose) 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부항을 떠났다. 이튿날(12일) 저녁 6시경 서해안 남양만 앞바다 입파도 인근에 정박했다. 14일에는 강화해협을 30㎞나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 동북단 갑곶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조선군과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날 강화 수로 양안에 있는 돈대 및 포대를 병인양.. 2020.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