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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루하치2

임진왜란, 그 고통의 기록(2)-Ⅲ 조경남 『난중잡록』의 주요 내용(四)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 의병장은 정유년(1597) 8월에 비로소 자신이 외조모에 의지하여 자랐으므로 어머니로 부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전투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저자가 남원성에서 멀지 않는 용추동에 외조모를 모시고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우회하여 쳐들어온 왜적의 진입경로를 상세히 기술한 것도 전라도 지역의 전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로부터 조경남은 자신의 움직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1597) 10월 23일에는 노략질하는 왜적을 맞아 싸우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조경남의 의병활동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술년(1598) 6월에는 전라 병사 이광악(李光岳)의 휘하에 ‘막사(幕士)’로 종사하게 되었는데.. 2020. 12. 15.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5)-명의 후금 정벌군에 조선군 파병 17세기 전반 건주여진의 누루하치(奴兒哈赤)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大金:1616)을 세웠다. 조선은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전통적 우방국 명(明)의 관계도 고심거리였다. 후금은 1618년부터 여진족의 ‘칠대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만주지역의 요충인 무순(요녕성 무순시)과 청하(요녕성 청하 만족자치현)를 점령하며 명을 압박했다. 앞서 조선은 16세기가 저물어가던 1592년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때 명군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물심양면으로 큰 빚을 졌다. 지원군을 파견해 달라는 명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의 전쟁 후유증은 여전했다. 그런데 또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뛰어 들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국왕 광해군은 제3자로 관망하고 싶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명의 압박과 조정 중신들의 파병.. 2020.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