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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2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6)-청의 나선 정벌에 조선 조총수 파병 조선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중립을 유지한 결과 국정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3년에 광해군을 밀어내고 집권한 인조는 달랐다. 그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급기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군신맹약으로 치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조선은 절치부심하면서 비밀리에 북벌 계획을 세우고 군비를 확충해나갔다. 특히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즉위했기 때문에 복수심이 남달랐다. 조선에서 북벌의지가 고조되던 17세기 후반에 ‘나선(羅禪)’으로 불리는 러시아 세력이 청국의 흑룡강 유역으로 밀려왔다. 러시아는 흑룡강을 ‘아무르강’이라고 불렀다. 러시아 원정대는 1651년(효종 2)에 아무르강 상류지역 서안.. 2020. 5. 12.
우리 역사에 새겨진 해외파병(1)-해외 파병 역사의 이해 우리 역사에서 대외파병은 ‘파병’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다른 나라와 연합작전을 염두에 둔 파병이라면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元)나라 몽골군과 일본 원정에 출병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3세기 이후로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날까지 7백여 년의 파병 역사가 있다. 그러나 시대적 환경과 군사적 상황은 제각기 달랐다. 자위적 수단으로 출병하는 경우는 연합군을 편성하기 보다는 단독으로 작전을 벌였다. 주변 강국의 요청에 따라 무리한 출병을 단행한 경우는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파병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자주권이 크게 제약되어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례가 많았다. 불가피한 파병은 전장에 출동하는 군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많은 고통이 뒤따.. 2020. 4. 27.